Tuesday, Jul 15, 2025 at 6:32 PM
July 15, 2025•582 words
형님, 안녕하십니까? 형님과 작별한지 4년이 되옵니다. 어머니와 조카, 형수님도 무고하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남한으로 온 것에 대하여 잘했고 못 했고를 떠나서 형님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곳에 형님 어머니와 가족을 돌보느라 고생 많겠습니다.
형님,이 동생이 남한에 왔으니 그곳 식으로 표현하면 범죄자이고 그로인하여 고통 속에 살아갈 어머님과 형님을 생각하니 슬픕니다.
전 북한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배고픔과 경제적 빈곤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죠. 사람들을 오도 가도 못하게 이동을 통제하고 인간의 초보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하며 살기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직장에선 당조직이라는 것이 정신을 꽉 틀어잡고 직장밖에선 보안원들이 주린 배를 채우려는 늑대처럼 도사리고 집에 들어오면 담당보안원의 감시망 속에서 부부간에도 당과수령에 대한 효자다운 언행만을 강요하는 그런 사회가 싫었습니다.
형님, 지나간 이야기 하나 전해드립니다. 배급을 제대로 못 받던 1994년5월에 제가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을 모시고 평양창광거리 은덕불고기집에 간 적있습니다. 두 노인은 60대중반으로 전쟁노병이고 오랜 당원이고 한대 공장의 간부지에 있던 분들입니다. 정철아버지라고 생각나죠? 아버지도 그분도 당과수령밖에 모르고 살아오셨죠.
언젠가 두 분이 주고받는 말을 듣노라니 대화의 전부가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자식들 없는 때에 말로라도 먹는 상상을 할까? 하고 생각하니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음날 외화식당 표를 구해서 모시고 갔던 것입니다.
형님도 아실테지만 창광음식점엔 평양시민들도 일반 서민들은 구경도 못하는 곳이 아닙니까!
노인네들은 저의 손에 끌려 식탁에 앉았는데 마치 오지 못할 곳에 온 사람처럼 죄스러운 자세더군요. 괜히 주눅이 들어 앉아있는 아버지께 <아버지, 여기서 소불고기와 평양냉면, 봉학맥주를 하는데 마음껏 드십시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내 생전에 이런 식당에도 와 보는군...이런 곳엔 처음이다.>고 하시더군요.
막상 얼마 잡숫지도 못하시는 노인들이여서 갈 때 2인분씩 포장해서 나왔습니다. 잡수시면서도 뭔가 미안해하는 자세였습니다. 아마 혼자 고급스러운 곳에 와서 먹자니 미안한 사람도 있었겠죠.
그 후 3년 후 두 노인은 한 달 간격으로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습니다. 수많은 노인들처럼 우리 아버지도 배고픔과 싸우다가 쓰러지신 것입니다. 숨을 거두시기 전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난 우리나라에 그런 희한한 식당 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둘째 덕분에 외국 사람들 드나드는 식당에서 먹어봤다>고 했답니다.
아버지 사망 직후 아버지가 정히 다루시던 궤짝을 정리하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1년 전에 전국노병대회참가자들에게 선물로 준 설탕3킬로그램과 흰쌀 2킬로그램, 찹쌀500그램, 식용유 한병, 현금 200원이 있었는데 포장겉면마다 <노친생일에 쓸것>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제각기 바빠서 부모님이 그토록 굶주림을 이겨내시느라 고생하신 것을 미처 알려고 노력하지 못했죠. 어머니말씀이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3개월 전부터 쌀이 없어서 옥수수죽에 능쟁이풀을 많아 섞어 잡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서 여러 식량사정이 어려운 집들에서 먹는다는 능쟁이 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먹으면 배는 부른데 칼로리는 없고 오래 먹으면 중독이 온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그때 평양시의 어려운 집들에서는 토끼풀을 뜯어간다고 하면서 집에 가져가서는 풀죽을 끓여먹으며 살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형님, 기억나십니까? 1993년 여름에 통일거리 광장 앞 민예전시관에 갔다가 통일1동 71반 21층에서 투신자살한 전쟁노병이 생각나죠? 길 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죠. 굶다 못해 화가 난 어젯날의 간부가 집에 갇혀 배고픔을 참다 못해 자살을 했던거죠. 그런 일이 여기 저기서 보이면서 전 나라꼴이 비참해 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적어도 자유가 그리웠습니다. 적어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수령님에 대한 충실성을 근거로 하는 전 사회적 일심단결 과 중앙집권제적 민주주의란 것이 한평생 등뼈가 휘도록 일하는 인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고생을 각오하고, 어머님과 형님께 미안함도 생기지만 여기 남한으로 왔습니다.
여기 남한에서는 당조직 생활도 없고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받는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면 그만이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돈을 벌어 풍요로운 삶을 꾸려가는 것이 저의 보람입니다.
훗날 통일되어 만날 때가 되면 제가 해야 할 몫이 크다고 보고 지금은 반역자라고 하든, 도주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에겐 오직, 현재의 저와 저의가족의 삶이 중하고 그리고 어머님과 형님이 무사히 계시기만을 바랍니다. 통일되는 날까지 건강하십시오.
2006년 6월19일. 남한에서 동생 올립니다.
형님께 드리는 兄弟의 편지 (繁體中文翻譯)
── 2006年6月19日,來自南韓的弟弟
──
형님,您好!與您分別已經四年了。想到母親、侄子和嫂子都安然無恙,心裏仍覺沉重。關於我來到南韓這件事,無論是對是錯,我只充滿對您的歉疚。這裡生活艱難,不僅要照顧自己,還要擔心在朝的母親與家人,您一定也操勞良多。
형님,這個弟弟來到南韓,用那邊的說法我是「犯罪者」,想到因此讓母親和您在痛苦中度日,我非常難過。
我討厭在北韓發生的一切。連與家人一起過平凡的生活都很困難。饑餓與經濟貧困尚且能忍受,但人們的行動被嚴格控制,最基本的人權被剝奪,日子真是痛苦。
在單位裡,有黨組織緊緊束縛人的思想;單位外,保安員如飢餓的狼般巡邏;回到家中,還在監視網裡,夫妻之間也只能強行說出對黨與領袖的「忠誠」之言。我無法忍受那樣的社會。
형님,說一件往事給您聽。1994年5月,配給糧食極少的時候,我帶父親和父親的朋友去平壤昌光街的恩德牛肉店。那兩位都是六十多歲的戰爭老兵,資深黨員,也曾是某工廠的幹部。您還記得「正哲父親」吧?他們一生只知道黨和領袖。
我聽他們談話,話題全是食物。那麼饑餓,以至於在沒有孩子的時候也要靠想像吃飯來解饞,想到這裡,我覺得自己必須盡孝。於是第二天,我弄到了外幣餐廳的入場券,帶他們去了那裡。
형님也知道,昌光餐廳是平壤市民和一般老百姓根本進不去的地方!兩位老人坐下後,彷彿來到不該來的地方,惶恐不安。我對父親說:「父親,這裡有牛肉燒烤、平壤冷麵和鳳鶴啤酒,您儘管享用。」父親卻說:「我這輩子還沒來過這種餐廳……真是第一次啊。」
可是他們食量已小,吃不多,走的時候還打包了兩人份帶走。吃的時候還有點愧疚,或許覺得自己不該獨自到高檔場所用餐吧。
三年後,這兩位老人相繼因營養不良去世。像許多老人一樣,我父親也是與饑餓抗爭倒下的。在他去世前,他說:「我這輩子都不知道有這種餐廳,多虧你帶我去,才嘗到外國人去的地方的美食。」
父親去世後,我整理他生前保管的箱子,震驚不已。裡面有一年前他在全國老兵大會上得到的禮物:3公斤糖、2公斤白米、500克糯米、一瓶食用油和200元現金。包裝外面都寫著「留給老父親生日時使用」。
我們兩兄弟都忙,沒能及時瞭解父母為了忍受饑餓所受的苦。母親說,父親去世前三個月因沒米,只能在玉米粥裡摻很多野菜草充飢。
所以我去調查那些困苦家庭吃的野菜草——吃了能填飽肚子,卻幾乎沒有熱量,長期吃還會中毒。我知道,那時平壤困難家庭會採集三葉草,帶回家煮草粥充飢。
형님,您還記得嗎?1993年夏天,在統一街廣場前的民藝展覽館,統一1洞71班21層有位戰爭老兵跳樓自殺的事。路人都看見了──他因饑餓憤怒,在家被關得受不了,才結束了生命。類似的悲劇不斷上演,全國人民都感到哀痛。
我渴望自由,渴望不再有人餓死的土地。北韓所謂對領袖的忠誠、全社會的一心團結與中央集權式民主,都不是背負重擔、辛苦工作的人民所需要的。
因此,我決心冒一切風險來到南韓。雖然對母親和 형님感到歉疚,但我別無選擇。
在南韓,沒有黨組織生活,也不用被強迫效忠領袖。只要努力生活,就能自主。做自己能做的事、賺自己的錢,這就是我的幸福所在。
未來統一那天,我要承擔應盡的責任。現在無論他人稱我為「叛徒」或「越境者」,我都不在乎。對我而言,當下我和家人的生活最重要,只願母親與 형님安然無恙。願您健康,直到統一之日再相見。
2006年6月19日,來自南韓的弟弟 敬上